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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메갈리아의 반란

메갈리아의 반란
  • 저자유민석
  • 출판사봄알람
  • 출판년2017-01-25
  • 공급사(주)북큐브네트웍스 (2020-01-15)
  • 지원단말기PC/스마트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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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갈리아 이전엔 아무 문제 없었다”고?

    ―혐오발언의 침묵시키기 효과



    혐오발언의 유형과 그 사회적 효과, 혐오발언의 대상자들이 겪는 부정적 영향에 대해서는 이미 다방면의 연구가 있다. 세상에는 인종, 성적 지향, 성별, 계급 등에 따른 다양한 혐오발언이 존재한다. ‘흑인은 투표할 수 없다’는 것, ‘유대인은 혐오스러운 민족’이라는 것, ‘여자는 멍청해서 남자한테 안 된다’는 것은 모두 혐오발언이다. 이러한 혐오발언은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권위 있는 집단으로부터 그렇지 못한 집단을 향해 행해지기 때문에, 혐오발언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어떤 권위의 표지가 된다.



    영미 언어분석철학자들이 지금까지 분석해온 혐오의 언어가 주로 유대인, 흑인, 성소수자, 여성 등을 향한 것이라 할 때, 한국의 혐오발언은 그 대상이 주로 여성에게로 편중된 것이 특징이다.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직장에서 받는 제약, 가정에서 짊어지는 역할 기대, 온라인에서 마주쳐야 하는 혐오발언 등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이에 대한 문제 제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소수자 혐오가 상대적으로 사회적 지위를 획득한 이들로부터 그러지 못한 이들에게로 행해지는 상황에서, 문제 제기는 발화되지 못하거나, 발화되더라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레이 랭턴의 구분에 의하면 이러한 침묵은 (1)혐오발언 피해자가 겪게 되는 이러한 침묵은 피해자가 가해자를 두려워하거나 보복을 두려워해 반론하지 못하는 “발화행위적 재갈”, (2)말대꾸를 행하지만 권위가 없기에 간단히 무시당하거나 권위 있는 자의 마음대로 의도를 곡해받게 되는 “발화효과행위적 좌절”, (3)아예 ‘대항발화’를 행할 수 있는 관습이 없기에 대항의 언어 행위 자체를 수행할 수 없는 “발화내행위적 불능” 등 여러 유형으로 나타난다. 저자는 여러 학자의 분석을 인용하며 이러한 ‘침묵시키기’가 혐오발언의 주목해야 할 효과임을 강조한다. 예컨대 몰래카메라라는 범죄를 비판하는 여성에 대해 “님은 몰카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은데요?”라고 말하는 것, 여성혐오적 미디어 재현에 불편을 표했을 때 “피해의식 심하시네”라는 식의 대꾸는 혐오발언에 대한 대응을 좌절시키며, 이런 환경 속에서 혐오발언의 피해자는 ‘침묵당한다’.



    “인터넷의 여성혐오쯤 무시하면 되지, 똑같이 대응할 필요 있느냐”고?

    ―혐오발언의 선동 효과



    혐오발언은 피해자를 침묵시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여러 연구자가 혐오발언의 중요한 효과로 ‘선동’을 꼽는다. 예컨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여러 신문 기사는 유대인을 각종 범죄자로 묘사하고 있다. 유대인의 특징을 지닌 남자가 아이들을 꾀어내는 어떤 허구의 이야기는 세계에 대해 어떤 것을 말하며 전제한다. ‘유대인은 아이들을 납치한다’라는 사실 주장 명제, ‘유대인을 혐오하는 것은 올바르다’는 규범 명제, ‘훌륭한 독일인이라면 유대인을 혐오한다’는 사실 및 규범 명제 등이다. 이것이 성공적으로 전달된다면, 메시지를 전달받은 이가 유대인에 대해 갖는 인식은 변화한다. 혐오의 언어는 힘이 세다. ‘유대인은 전부 사기꾼이다’, ‘흑인은 어리석다’ 같은 혐오발언은 대다수의 사회 구성원이 그것을 몰상식하고 근거 없다 여긴다 해도, 지속적으로 존재하고 발화되는 것만으로 어떤 효과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여러 연구를 통해 증명된 사실이다.

    이렇듯 혐오발언은 청자의 인식 세계에 어떤 전제를 심어주고, 이것을 사실로 만들어 혐오를 선동하고 재생산하게끔 한다. ‘김치녀’라는 표현 역시 마찬가지다. ‘남자에게 기생하는 사치스럽고 이기적인 김치녀’를 향한 혐오발언은 ‘김치녀라는 이기적인 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 주장 명제를 확산하여 ‘김치녀를 혐오하는 것은 올바르다’는 혐오를 선동한다. 김치녀를 향한 욕설은 폭넓게 반복 재생산되는 것만으로 여성의 소비를 사치로, 그것을 죄악으로 기정사실화하도록 선동하고 혐오를 정당화하는 셈이다. 그리고 혐오발언이 갖는 이와 같은 선동성은 청자의 인식뿐 아니라 욕망까지 변화시킨다. 미디어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좋은 여성’(현모양처, 개념녀)과 ‘나쁜 여성’(김치녀, 된장녀) 이미지의 이분법적인 재현 방식과 선동으로 인해 여성은 여성 집단 내에 ‘여자 망신 다 시키는’ 이기적인 여성(김치녀)이 존재한다고 믿게 되고, 스스로 그렇지 않은 여성(개념녀)이 되기를 욕망하게 된다. 피해자 집단이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혐오의 언어가 선동하는 인식에 맞추어 스스로의 인식과 욕망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김치녀와 된장녀를 향한 혐오에 동조하게 되는 것이다(‘코르셋을 입는다’고도 한다).

    이미 숱하게 존재하는 여성혐오적 편견과 혐오발언들을 ‘그냥 무시하면 된다’고 말하는 것은 때문에 전혀 해결책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존재하는 혐오’에 대한 이런 적극적 방관은 혐오발언에 “파생된 권위”를 실어줌으로써 혐오에 가담한다. 혐오발언은 사회적으로 더 적은 권위를 가진 집단에 행해져, 그들을 향한 부정적 사실을 선동하고 혐오를 착실하게 확산시키도록 작용하기 때문이다. 혐오발언은 잘못된 인식을 선동하면서 청자의 대응을 침묵시키며, 이에 대한 ‘무대응’은 여기에 힘을 실어준다. 그렇다면 혐오발언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여기서 주디스 버틀러의 ‘반란적인 발화’ 개념이 등장한다.



    메갈리아의 “반란적인 발화”

    ―혐오발언에 맞서는 가장 효과적인 전략



    여성혐오와 침묵의 악순환 속에서 메갈리아가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그들은 어떻게 침묵을 깨고 되받아쳐 말할 수 있게 된 걸까? 혐오발언이 여성을 침묵시키고 열등한 지위로 못 박아두는 효과에 주목한 레이 랭턴과 달리, 주디스 버틀러는 혐오발언 자체에 ‘저항의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혐오발언에 의해 호명되는 이들은 이에 대응해 ‘반란적인 발화’를 할 가능성을 손에 넣는다. 혐오발화자들은 혐오발언의 피해자들에 비해 사회·관습적 권위를 가지고 말을 하지만, 관습이 보증하는 권위는 특정 주체에게 필연적으로 종속되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혐오발언이 발화되는 순간 그에 대한 대항발화를 통해 기존의 권위를 교란할 수 있다는 것이 버틀러의 주장이다. 이때 이러한 반란적 언어 행위는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내고 기존 권력 관계를 재편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1955년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는 나중에 버스에 탄 백인에게 좌석을 양보하라는 백인 운전기사의 명령에 대항했다. “나는 내가 옮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종 분리정책이 행해지던 당시 몽고메리 지역에서 로자 파크스의 ‘거부’는 허용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 파크스는 “권위를 부여받지 않고서 권위를 가지고 말하기”를 행했고, 이 순간 기존에 백인에게 존재하는 듯 보였던 권위에 균열이 발생했다. 파크스의 발언은 이후 버스 보이콧 운동으로 이어졌고 파크스는 인종 분리정책에 저항하는 국제적 아이콘이 되었다.

    기존에 여성은 “여자는 스물다섯 넘으면 꺾인다”, “여자는 3일에 한 번 패야 한다”는 혐오발언의 대상이었다. 역으로 이 관습 체계에서 “남자는 3일에 한 번 패야 한다”는 언어는 ‘발화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메갈리아의 ‘미러링’은 이 침묵을 깨고 반란적인 발화를 시작했다. 한국 여성을 비하하는 ‘김치녀’에 대항해 한국 남성을 ‘씹치남’이라 부르고, “강간당하기 싫으면 안 돼요, 싫어요 했어야지. 즐긴 것 아니냐?” 따위의 발언을 “군대 가기 싫었으면 안 돼요, 싫어요 했어야지. 즐긴 것 아니냐?”고 되받아쳐 말했다. 이러한 방식은 기존의 관습 지형에서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던 여성혐오발언을 비로소 논쟁의 대상으로 끌어 올렸으며, ‘권위를 가지고 말하던 이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메갈리아는 관습을 전복시킴으로서 기존 혐오발언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전 김치녀 아닙니다. 더치페이도 열심히 해요’라고 대답하는 대신 ‘네, 다음 한남충’이라고 대답함으로써 기존 혐오발언의 겨냥 목표를 좌절시킨 것이다. 이러한 대응은 기존의 혐오를 무력화하면서 이전에는 ‘할 수 없던 말’을 할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로자 파크스의 반란적인 발화가 그러했듯, 메갈리아의 반란적인 발화는 여성혐오발언을 논쟁의 영역에 올려놓으면서 기존에 침묵하던, 혹은 코르셋을 졸라매던 많은 이가 ‘말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메갈리아에 관한 편견과 무지 넘어서기



    이 책은 영미 언어분석철학자들의 이론을 적재적소에 활용해 ‘메갈리아’라는 새로이 등장한 주체에 관해 다방면의 분석을 제공한다. 혐오발언의 기본적인 속성부터 그 파급력 및 혐오의 작동 방식을 알아보고, 이때 무엇이 혐오발언에 힘을 실어주며 무엇이 이에 맞서는 계기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지금 수년 째 가장 논쟁적인 사회문제인 여성혐오는 이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이해가 비교적 급속히 발달하였으며 현재진행형이기에, 분석 대상이기보다는 단발적인 공방으로서 지속되는 면이 강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책은 ‘메갈리아’라는 가장 민감한 키워드를 언어철학적으로 분석해 일단의 봉합을 시도한다. 메갈리아의 방식이 낳은 명백한 파급력은 어떻게 사유될 수 있는지, 그리고 관련된 비판에 대해 어떤 입장이 가능할지에 책은 하나의 이정표를 제공하고 있다.

    메갈리아의 반란적인 발화가 미친 영향은 단지 특정 커뮤니티, 혹은 특정 혐오만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적 약자의 언어로 행위할 수 있는 역량, 발화와 권력 간의 관계라는 보다 정치적인 문제를 제기했으며, 기존 혐오발언이 가졌던 힘을 재전유해 대항발화를 행함으로써 전복적 효과를 가져왔다. 혐오발언은 누군가에게 수치심을 준다. 그러나 이 혐오발언에 대한 공격적인 재전유는 기존 혐오발언에 이의를 제기하고, 이를 약화시키도록 기능한다. 메갈리아는 이를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다.

    메갈리아의 미러링은 사이버 공간에서의 혐오발언의 힘을 약화시킬 뿐 아니라, 혐오발언 피해자의 대응 능력을 키워줌으로써 기존의 여성혐오에 대한 효과적 대응이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여성혐오 앞에서 수많은 여성이 겪어온 ‘침묵’에 균열을 낸 메갈리안의 ‘말대꾸’는 혐오발언에 맞서는 훌륭한 ‘반란적 발화’의 한 형태다. 현 시점에서 메갈리아에 대한 평가는 물론 완결적인 것일 수 없다. 책의 일부 분석에 대한 반론이 추천의 글로 함께 실린 것도 이러한 이유다. 해당 이슈에 관해서는 정당한 평가와 유의미한 논쟁이 절실하며, 메갈리아의 실천과 관련해 제기된 다양한 문제는 이 ‘운동’ 속에서 지속적으로 성찰되어야 한다. 다만 한국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를 사회문제의 영역으로 가시화하고 공론화한 ‘반란’의 시작점으로서 메갈리아의 실천이 무엇이었는지를 제대로 알고 기록하는 데, 이 책은 유의미한 출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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